신작(Newly)

(18021~22)그 다음도 우리는 / 손정모

intervia 2018. 10. 30. 21:34


      그 다음도 우리는 / 손정모(18022) 뿌연 안개속이었다 호수 위에 선 나무 강물을 헤엄쳐 휘익 날개를 꺽었다 물속에 빠지더니 별하나 툭 튀어 올랐다 그가 말했다 자아 칼을 뽑아라 칼 끝이 별을 쪼개어 우수수 떨어졌다 대단하다 그대 저것 보다도 한 칼에 잡은 손 피가 흘렸다 눈물이었다가 강물이었다가 호수였음은 그대가 더 잘 아는 것 허허실실 크어억 바람의 노래 한 잔 술에 타버린 별빛 흐느낌 속에서 스멀거리는 구토의 한 안개는 잠시 머물다 호수를 떠났다 진검승부는 이제 시작 그대 보이는가 아무도 없는 빈자리 그 공동묘지의 결투를 별 하나 떨어져 내렸다 자아 준비는 됐는가 그가 말했다 희뿌연 눈빛 두 개 그리고 다섯 손가락 너무 아파하지 마라 가슴 뻥뚤린 구멍에서 바람이 전하는 말 휘이휘 멋져 잘 죽었다 땡땡땡 종소리가 들렸다 저 산 언덕너머 오솔길 홀로 가는 길손 멀어져 가는 나무 한 칼에 뉘었다가 불 속에 넣었다가 빈 손 위에 춤추는 나비랑 손가락 걸고 자아 한 잔 받어 안개속을 휘익 지났다 아직 멀었지 다아 때가 있는거여 급하지 말게 황금마차는 느긋하게 석양을 향해 달리고 공동묘지엔 비석이 이름 석자를 걸고서 하나 둘 일어서고 있었다 그게 만장 같기도 하고 그런 날의 바램도 너 참 멋져 잘 죽었다 그 종소리 끝났다 그 다음도 우리는 아마도 잘 살겠지 ~~~~~~~~ 달빛 싸늘한 별앞에서 / 손정모(18021) 밤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표정을 알 수 없다 밝은 옷은 빛을 반사한다 눈 빛은 동공속에서 밝은 빛이다 빛이 빛을 두려워 어둔 산 길 발 밑을 비추며 간다 까만 새들은 어둠속에서 별 빛을 헤어 본다 까악까악하고 울고싶어한다 그 많든 밤의 불 빛들 쉬엄쉬엄 꺼지고 오두막 호롱불 하나 둘 남은 어두운 밤길 길손의 마음도 터벅거린다 적막이 감도는 낡은 빈집들 패자의 잔해속 승자의 그림자 그 눈 빛에 쌓인 다름질의 열기 탄다 낡은 돈의 냄새가 사라진다 빳빳한 방금 찍은 새 돈 뭉치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 많든 하늘에 별들도 샐 수 없어 부르든 노래는 기억도 없이 쓸쓸하다 이제는 하나 둘 보이는 별들이 운다 보름달 보다 반달이 더 많다 쪽박이라 하면 그림같은 초승달이 갈 길 잃어 가물거리면 어쩌노 ( #부암1구역... ) ~~~~~~~~ ~~~~~~~~ 가을산에서 / 손정모(121009) 가을이 오라 합니다 바다로 가고 싶은데 여름 바다는 떠나고 가을은 산으로 왔습니다 달리고 싶은 욕망을 타는 가슴으로 저만큼 어디에 선가 손짓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바다가 보고 싶은데 가만이 눈을 감고 귀 기울이고 듣는 소리 가을이 타는 바다는 햇빛에 놀고 있습니다 배 부른 가을의 노래 가을 산에서 손짓하고 있습니다 ~~~~~~~~ 못난 자격증 / 손정모(15023) 달달달 하다 왔네오 국민교육헌장만 외우면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줄 알았다오 아침 7시 집나갔어 밤 9시 집에 올 때까지 달달달 해도 대한민국 국민은 못 되는가 봅니다 인자는 국민교육헌장이 세발에 피 벌겋게 외워보니 국이 평 돌아 논이 됩니다 하이구야 논이 돈이 될려면 또 어찌해야 할꼬... 이래저래 대한민국 국민은 이리 힘들다 어떤 사람은 자격증이 종이 한장이라 하는데 이놈 종이 한 장이 와이리 무겁노 어떤 놈이 오만원권으로 살랑살랑 흔드는데 내 바지는 우째 피눈물에 젖네 에이 못쓸놈의 세상 어찌 가벼운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만 늘 가볍네 나만 가벼워 달달달 힘이 하나도 없네 누가 나 좀 툭 차 주라 좀 엎어져 누워보게 누워서도 달달달 그라면 돈이 될려나 돈이... 그놈의 종이 한장이 나를 이리 힘들게 하네 ~~~~~~~~ 오보라고 / 손정모(17024) 여보게 친구 요즘 유행어가 뭔지 아나 내가 말하면 진실이고 니가 말하면 거짓이고 말 안하면 바보 천금이야 돌이 금이되는 세월 금이 돌이되는 정년 진실 게임이라 하지 여보게 친구 선의의 거짓말이 약이되고 악의의 진실이 똥이되는 그런 말의 값어치를 셈하고 선의라는 가치와 악의의 가치 진실의 가치와 거짓의 가치 사익과 공익 없이 맨입으로 말은 장난같지 뒹굴고 가지 여보게 친구 믿을게 없는데 진실이라고 진실이 없다고 거짓이라고 사랑타령으로 그러더라고 헤어지면 악해지는게 인심 인심이 못나보면 병신되고 잊을만 하면 뒤집어 보는거야 옛사진이 오늘보고 말해보래 여보게 친구 요즘 그렇게 폭탄을 돌려 모든게 엉터리로 폼 잡았어 십원으로 거짓말을 해 싸다고 그러 진실은 돈이 안돼 알지 비싼 말은 거짓이야 더 무서운 건 돈없이 하는 말 봉이 김선달 제비 다리 함 뿌질러 봐 친구 육갑은 그런 거라고 나라돈이 쌈지돈 육갑으로도 타고 씨씨1999세단을 아무나 못 타는데 여보게 친구 내가 말하면 거짓이고 니가 말하면 진실일 때 나는 돌이되고 니는 게임의 승리자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지 ...... (20년 이상 도를 닦아도 미물은 미물, 사람은 사람 구렁이가 용되지 않는다 용처럼 까불어 보는거지 그래도 그렇지 그 세월이 얼만데 십원의 가치도 안돼 그 30년을 약을 팔고도 비려먹어 서당개도 라면을 끓인다는 데 겨우 십원에 영혼을 팔어 그런 세상인거야 이세상이 그런 세상이야) ~~~~~~~~ 놓아보니 / 손정모(15024) 빈손으로 찾은 고향산마루 어린 산 까치 때가 놀고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이리 날고 저리 날면서 푸른 하늘과 가을 이산 저산 산비둘기 때와 노닐었다 어찌 왔느냐고 물어 시는 것 같아 나는 이미 산이 되었다고 하신다 자연을 거슬리는 마음 한 쪽의 싸한 때 늦은 벌초를 하면서 저도 이제야 놓았습니다 어린고향이 이미 늙은 고향이라 산이 산인들 잡초만 무성 길 잃은 사람도 길을 찾는 사람도 어디서 무얼하든 몸만 성하다면 다시 못 볼 그리움 한 잔 다아 놓아보니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젊음 그리도 애타도록 보고파 하지 않아도 길이길이 아닌 들판에서도 잡초에 묻힌 내 생애의 필적 산이 되어도 다시는 아파하지 않으리 나는 본디 잘나지도 않았으며 빈손으로 돌아 본 내 고향 이미 저문 빈손이었든 것을... ~~~~~~~~ 가을 타는 도시 / 손정모 (13041) 춤을 춥니다 색색이 아롱진 불빛이 흐릅니다 지난 것은 잊어야 한다고 낙엽 되어 흩날리는 어둠 속으로 춤을 춥니다 남몰래 남몰래 잊어야 한다고 가을 저 만큼 손짓하는데 불빛에 아롱진 추억 같은 열정이 흐르는 것이 스멀스멀 춤을 춥니다 가을 타는 도시에서 이별을 아쉬워하며 춤을 춥니다 뜨겁게 뜨겁게 훨훨 타는데 추워요 이 가을이 속삭입니다 ~~~~~~~~ ~~~~~~~~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잇몸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너의 모습 / 이정아 산이 가까워질수록 산을 모르겠다. 네가 가까워질수록 너를 모르겠다. 멀리 있어야 산의 모습이 또렷하고 떠나고 나서야 네 모습이 또렷하니 어쩌란 말이냐, 이미 지나쳐 온 길인데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인데. 벗은 줄 알았더니 지금까지 끌고 온 줄이 산그늘이 깊듯 네가 남긴 그늘도 깊네. ~~~~~~~~ 사랑의 사람들이여 / 이해인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두 사람이 꽃과 나무처럼 걸어와서 서로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 오랜 기다림 끝에 혼례식을 치르는 날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라 둘이 함께 하나 되어 사랑의 층계를 오르려는 사랑의 사람들이여 하얀 혼례복처럼 아름답고 순결한 기쁨으로 그대들의 새 삶을 채우십시오 어느 날 시련의 어둠이 닥치더라도 함께 참고 함께 애써 더욱 하나 되는 사랑의 승리자가 되어 주십시오 . . 상중친구가 사용한 주례사에서 ~~~~~~~~ 낙화유수 / 남인수노래 이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실어 마음을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넘자 이강산 흘러가는 흰구름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어린 봄나루에서 행복의 물새우는 포구로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것이 풍속이러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 이별이 아픈 이유 (KIM. J.D.) 사랑은 가슴에서 잉태된다. 정신으로 성장한다. 눈물로 소멸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별이다. 이별은 사랑이 긴 여정을 마치고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별은 종착역에서 두 영혼이 갈라서는 것이다. 하얀 눈이 가득 쌓여 있는 설원(雪原)을 지날 때 기차는 행복했다. 꿈속에서 달리는 것처럼 눈꽃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이는 시간을 보냈다. 창밖에 펼쳐지는 무지개빛 환상들을 가슴에 품고 마시던 한 잔의 커피는 지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그런 사랑이 어느 날 사라진다. 어디론가 증발된다. 사랑을 잃어버린 남자는 여자를 찾아 다시 눈이 쌓인 곳으로 떠난다. 눈 속에서 길을 잃고 끝내 다시는 도시로 돌아오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안타까움을 노래한 고려 가요가 있다. ‘가시리’라는 이 노래는 귀호곡(歸乎曲)이라고도 한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난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선하면 아니 올셰라 셜온님 보내압노니 나난 가시난 닷 도셔 오쇼셔 나난 (가시리 가사 중에서) 가시리는 헤어지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애통함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떠나가는 님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고려 시대의 가요인 가시리의 전통을 이어 받아, 김소월도 이런 이별의 한을 진달래꽃에서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2010년 2AM이 다시 ‘죽어도 못 보내’라는 노래로 이별의 안타까움을 강렬하게 노래하고 있다. 어려도 아픈 건 똑같아 세상을 잘 모른다고 아픈 걸 모르진 않아 죽어도 못 보내 내가 어떻게 널 보내 가려거든 떠나려거든 내 가슴 고쳐내 (2AM,죽어도 못 보내, 가사 중에서) 일찍이 임희숙은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에서 이별의 슬픔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젠 그 누가 있어 이 외로움 견디며 살까 이젠 그 누가 있어 이 가슴 지키며 살까 (임희숙,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가사 중에서) ~~~~~~~~ 한계령에서 1 / 정덕수 . .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메일지. 삼만 육천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빛 푸른 별은 돋을까 . .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 .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 .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 .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 .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 .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 .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 ~~~~~~~~ 소를 죽이다 / 전원책 소를 잡았다 그 큰 눈을 들여다보다가 질긴 갈빗살 어금니에 씹힐 때 꼬리까지 놓아두고 어서 도망가라고 엉덩짝을 후려팬다 젠장 그럼 그렇지 소를 보았다는 것이 설혹 부처를 보았다는 것이 흔한 비유의 나뭇잎이나 보았다는 것이 다 무엇이냐 등을 떠밀려 죽는다는 것이 당연할 뿐인 당연하다고 여겨질 뿐인 정감 넘치는 만찬 한 마리 황소로 도망가는 저 멋진 보행이 행복에 겨워하는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고 요술처럼 숨어있었던 것이냐 소는 분명히 지나갔는데 상상이 아닌 소는 달아났는데 어금니에 씹히는 살코기의 이 더러운 쾌감 (십우도.....) ~~~~~~~~ 저 가을 속으로 / 박정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부신 꽃잎만 던져놓고 돌아서는 들끓는 마음 속 벙어리 같아. 나는 오늘도 담 너머 먼발치로 꽃을 던지며 가랑잎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내사 짓밟히고 묻히기로 어차피 작정하고 떠나온 사람, 외기러기 눈썹줄에 길을 놓아 평생 실날 같은 울음을 이어갈 것을 사랑의 높은 뜻은 비록 몰라도 어둠 속 눈썰미로 길을 짚어서 지나는 길섶마다 한 방울 청옥 같은 눈물을 놓고 갈 것을 머나먼 서역 만리 저 눈부신 실크로드의 가을이 기우뚱 기우는 저 어둠 속으로 ~~~~~~~~ 나예요 / 랄라 카슈미르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전통 가수나 종교의 신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의미를 모르지만 왠지 가슴에 와닿아 다가가서 물으면 랄라의 시라고 한다. 루미, 카비르와 더불어 랄라는 페르시아-인도 신비주의 시문학의 꽃이다. 랄라의 초기 인생은 불행했다. 열두 살에 결혼해 시어머니의 멸시와 학대에 시달렸다. 그녀가 밥을 많이 먹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시어머니는 밥그릇에 돌을 넣고 그 위에 소량의 밥을 얹어 주었다. 랄라는 불평 없이 먹고 다음의 식사를 위해 그릇과 돌을 씻어서 얹어 놓았다. 새벽마다 강에 물을 길러 가야 했는데, 강을 헤엄쳐 건너편 사원에 가서 기도를 하곤 했다. 늦는 것을 눈치챈 시어머니는 불륜을 의심했고 남편은 덩달아 폭력을 휘둘렀다. 마침내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무의미한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구도의 길을 떠났다. 거의 나체가 되어 떠돈 랄라는 힘들 때마다 신에게 기도했다. "나예요, 랄라." 그것이 기도의 전부였다. 사실 그 이상의 무슨 말이 필요한가. 견딜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나를 속속들이 아는 이에게 "나예요."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정말로 힘든 친구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나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모든 말을 한 것이다. 그 속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친구가 아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신에게 말하는 순간 나는 나의 고통과 슬픔만이 아니라 나의 존재, 나의 오롯한 진실, 나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때 나는 더 이상 누추한 자가 아니다. 그때 나는 내 삶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대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다. 랄라는 기도했다. "당신이 누구이든, 나예요, 랄라." 당신이 신이든, 무한한 힘이든, 대자연이든, 존재계 전체이든 내가 이곳에서 말을 건네고 손을 내민다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있음을, 이 지상에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때의 나는 에고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더 큰 세계가 나와 함께하고 있다. 그 믿음이 방황하는 랄라를 잡아 주었다. 영혼이 두 동강 나려고 할 때, 마음이 벼랑으로 미끌어지려고 할 때, 그때가 기도의 시간이다. 여러 종교의 기도문을 들었지만 나는 이보다 더 진실하고 아름다운 기도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어떤 아픔을 겪었든 삶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의로 들린다. "나예요, 랄라." 나를 보세요. 아무것으로도 나를 가리지 않고 당신 앞에 섰어요. 내 아픔의 진실을 묻어 버리지 않을 거예요. 무의미하게 생을 마치지는 않을 거예요. 어떤 고난도 절망도 나를 무너뜨리지 못했어요. 또 다른 역경이 나를 쳐서 일으켜 세웠으니까요... 언젠가는 이 시련이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 거예요. 이 삶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선물임을 알게 될 거예요. 랄라는 노래한다. 춤을 춰, 랄라. 오직 공기로 몸을 감싸고서. 노래해, 랄라. 하늘을 입고서. 이 빛나는 날을 봐. 어떤 옷이 이만큼 아름다울 수 있겠어? 이만큼 신성할 수 있겠어? 랄라의 기도가 우리 자신의 기도여야 한다. 가슴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영혼의 거듭남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외쳐야 한다. 이 지상에서의 시간은 끊임없는 자기 확인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든 바닷가에서든 히말라야에서든 마음속으로, 혹은 소리내어. "나예요." 랄라의 시집중에서 ~~~~~~~~ 멈출 수 있는 용기 / RYU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깊은 구멍에 빠졌다. 그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하다가 한참 뒤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 구멍이 거기에 있어서 빠진 것이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얼마 후 같은 길을 걷다가 그는 똑같은 구멍을 보았다. 하지만 못 본 척하고 다가가 다시 그 구멍에 빠졌다. 같은 장소에 추락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데 또다시 한참 걸렸다. 다시 그는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똑같은 구멍이 거기 있었다. 그는 그 구멍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또다시 빠졌다. 그것은 이제 습관이 되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다시 그 길을 걷다가 그곳에 있는 구멍을 보았다. 그는 구멍을 돌아서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 그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간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 용기, 계속 시도하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멈추는 용기' 또한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나쁜 습관을 멈추는 용기, 욕망과 집착을 멈추는 용기, 분노와 원망을 멈추는 용기, 마음속에서 계속 중얼거리는 타성을 중단하는 용기는 한 지점에 고착된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멈추는 순간 새로운 문이 열린다. 문학 청년답게 나도 담배를 피우던 시기가 있었다. 외투깃을 올리고 반쯤 탄 담배를 입에 문 실존주의 작가 카뮈의 사진이 크게 작용했다. 나도 그렇게 사시사철 검정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고 반토막 난 담배를 입에 물고서 괜히 옆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러다가 20대 후반에 서울을 떠나 1년 반 정도 경기도 산에 살았는데, 하루는 담배가 떨어졌다. 밤 시간이고 산이라서 내려가 사올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휴지통에서 담배 꽁초를 뒤졌다. 아, 현실에 적응도 못하고 산으로 도피해 걸인처럼 휴지통이나 뒤지는 누추한 인생이라니! 진실해지려는 노력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그런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담배에 대한 애착이 독을 대하듯 사라졌다. 한번은 인도의 명상 센터에서 생활할 때였다. 당시에는 한국에 전화를 걸려면 시내 우체국에 가야만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전화기로 다가가는데 창구 안쪽에서 전화번호와 시간을 기록하는 여성이 눈에 띄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숨이 멎을 정도였다. 신전의 벽화에서 막 걸어나온 듯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이었다. 공작새처럼 둥근 눈은 창으로 비쳐든 햇살을 받아 신비의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신은 왜 곁에 두지 않고 지상에 내려보냈을까? 신은 눈이 멀었단 말인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거의 매일 오토 릭샤를 타고 30분이나 먼짓길을 달려 우체국으로 갔다. 아침에 가고 오후에 간 적도 있다. 시내에서 빵을 산다는 핑계로도 가고, 책방이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도 갔다. 긴 줄 뒤에 대기하고 있다가 차례가 오면 설레는 가슴을 누르고 전화기 앞으로 다가가 그녀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 몇 마디라는 것도 수신국과 도시, 전화번호가 전부였다. 대인 관계에 문제가 없지 않던 내가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국제전화를 건 것은 내 인생에서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형제자매를 비롯해 번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인도에서까지 전화를 걸자 감동하거나 혹시 금전적인 부탁이 아닌가 의심했으며, 전화 내용이 목적이 아니었던 나는 난데없이 공작새 이야기를 하거나 아무 말이나 얼버무리고 요금이 더 나오기 전에 얼른 끊었다. 자나 깨나 천상의 미를 지닌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없는 형편에 비싼 돈 내고 가입한 명상 프로그램도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거듭했지만 어느 새 그녀 앞에 서서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전화 받은 사람이 “왜 자꾸 전화를 하는 거야?”라고 물으면 나는 못 들은 척하며 창구 안의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내가 아는 힌디어 문장을 말하곤 했다. "아즈 함 바훗 쿠시 헤(오늘 난 무척 행복해)!" "메 툼세 피아르 카르타 훙(난 너를 사랑해)!" 어차피 못 알아들을 테니까 상대방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하지 않았다. 비자 기간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1년 후 다시 갔다. 명상 센터에 도착한 다음 날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그곳 창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똑같은 햇살, 똑같은 창구였는데 충격적일 만큼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눈동자는 빛을 잃고 뺨은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가슴을 들뜨게 하던 매혹적인 존재는 간 곳이 없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천연두나 말라리아라도 앓은 걸까? 이유를 물을 수도 없이, 밝고 화려했던 신전 벽화가 불에 그을린 것처럼 퇴색해져 있었다. 그것이 그 우체국에 간 마지막이었다. 그녀의 변화된 모습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새가 둥지를 날아가듯 어떤 비늘이 내 눈에서 벗겨져 나갔다. 아름다움은 필시 추함으로 변하고, 애착은 괴로움으로 바뀐다는 진리를 깨달았을까? 아니면 인도의 신이 나로 하여금 그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런 환영을 펼쳐 보인 걸까?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말한다. "진정한 변화는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 인지의 영역이다. 백 번 각오하고 다짐하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빠졌던 그 구멍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구멍이 나타났을 것이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추락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그의 새로운 자아가 구멍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안 간힘을 쓰며 올라왔을 것이다. 영어의 '용기(courage)'는 프랑스어의 '가슴(coeur)'과 어원이 같다. 용기를 갖는다는 것은 희망으로 가슴이 차오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머리의 일이 아니라 가슴의 일이다. 머리는 무의미한 생각과 습관적인 절망에 빠지지만 가슴은 그 어두운 굴에서 헤어나는 법을 안다. 상처 난 가슴일지라도. 나는 기도한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용기와 때가 되면 멈출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타인에 대한 판단과 편견을 멈출 용기,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아집을 멈출 용기를 주소서. 내 안의 어둠에 먹이를 공급하는 것을 중단하고, 첫 둥지를 짓는 지빠귀 새처럼 현재의 순간에 살 용기를 주소서. 아울러......... ..... ~~~~~~~~ 삶은 공평한가 / RYU 그린란드 북부에 사는 이누구이트 부족은 이누이트 원주민의 일족으로, 생활이 현대화된 오늘날에도 몇 가지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사냥에서 얻은 포획물을 나누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사냥을 한 경우에는, 한 명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동안 다른 한 명이 포획물을 두 무더기로 나눈다. 그러면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사람이 원하는 쪽을 먼저 선택한다. 그가 어느 쪽을 고를지 모르기 때문에 처음 사람은 가능한 한 공평하게 사냥물을 나눌 수밖에 없다. 조사에 따르면 이누구이트족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자신들의 세계가 공평하다고 느낀다. "삶은 공평한가?"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은 의외로 적었다. 한 작가 친구는 삶이 불공평하다고 단언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작품집에 비해 다른 작가들의 책이 더 인기 있기 때문인 듯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카르마 법칙을 믿는 인도인 친구들도 부정적이긴 매한가지였다. 낮은 카스트의 사람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결정된 신분이 불만이고, 높은 카스트의 사람은 정부가 낮은 카스트들을 위해 시행하는 ‘아락샨(할당)’이라는 하층민 우대 정책 때문에 대학 입학과 취업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외교관을 부모로 둔 한 인도인 청년은 캐나다에서 유학했는데, 대학 졸업을 앞두고 런던의 회사에 인턴 사원으로 가기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지도교수가 다른 학생에게 그 자리를 주는 바람에 크게 좌절하고 귀국했다. 그 후 그는 부모의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둥 마는 둥하며 살고 있다. 그의 얼굴은 세상의 부당함에 화가 나 있었다. 수억 명의 빈민들 속에서 어려서부터 선택받은 삶을 산 것은 계산에 넣지 않고 있었다. 사람의 뇌는 자신의 모습을 5배 정도 더 예쁘거나 잘났다고 여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따라서 5배 정도 자신이 부당한 취급을 받는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영웅은 부당함을 무찌르기 위해 동굴 속 괴물과 싸우지만, 자신의 동굴 속에서 세상의 불공정에 대해 불평하는 영웅은 스스로 괴물이 된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가장 마음에 드는 대답은 산전수전 다 겪은 인도의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한 말이다. "인생이 끝나기 전까지는 삶이 공평한지 아닌지 누구도 말하기 어렵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농부가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데 어디서 소리가 들렸다. "사사살려 주세세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뱀 한 마리가 큰 돌에 눌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지 지치고 허기가 져서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농부는 뱀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연민심을 느껴 돌을 치워 주었다. 뱀이 얼른 기어나오며 말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해요." 농부가 "감사하긴 뭘." 하고 말하는 순간 뱀이 농부의 목을 휘감으며 말했다. "배가 고파서 당신을 먹어야겠어." 농부가 말했다. “잠깐! 내가 목숨을 구해 줬는데 나를 잡아먹겠다고? 이건 공평하지 않아." 뱀이 말했다. "삶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그리고 난 배가 고파." 하지만 뱀은 농부가 자신을 살려 주었으므로 기회를 주기로 했다. 세 종류의 동물에게 "삶은 공평한가?"라는 질문을 해서 한 마리라도 '그렇다'고 대답하면 농부를 놓아주기로 했다. 뱀에게 목이 감긴 채 농부는 들판을 가로질러 동물들을 찾아나섰다. 맨 먼저 만난 동물은 암소였다. 농부가 소에게 물었다. "삶이 공평하다고 생각해?" 소가 말했다. "움메에에. 당신은 나한테 언제나 맛있는 풀을 먹이로 주니까 아주 좋아아아. 하지만 나도 매일 우유를 주잖아. 만약 내가 늙어서 더 이상 우유가 안 나와도 나를 먹여 줄까? 아니잖아. 나를 햄버거 공장으로 보낼 거잖아. 삶은 공평하지 않아아아." 농부는 얼굴이 하얘지고 뱀은 "헤헤헤!" 하고 웃었다. 두 번째 만난 동물은 닭이었다. 농부가 "삶이 공정해?" 하고 묻자 닭이 말했다. "꼬꼬꼭 그렇진 않아. 당신은 나에게 먹이를 주고 안전하게 닭장을 지켜 주지. 하지만 나도 매일 달걀을 주잖아. 삶이 공평하냐고? 잔칫날이 되면 내가 맨 먼저 목을 내놔야 할 걸." 농부는 얼굴이 더 하얘지고 뱀은 "헤헤헤!" 하고 날름거리며 이제 한 번의 기회가 남았다고 말했다. 뱀에게 목이 휘감긴 채 농부는 들판 너머로 가서 마침 그곳을 뛰어다니는 토끼를 만났다. 농부가 상황을 설명하자 토끼가 말했다. "당신이 목숨을 구해 줬는데 뱀이 당신을 잡아먹으려 한다고? 난 그냥 토끼에 불과해서 삶이 공평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엄마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어. 그때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삶이 공평하든 공평하지 않든, 그것에 상관없이 넌 춤을 출 수 있다고 하셨어." "춤을 춘다고?" 하고 농부가 물었다. "추추춤?" 하고 뱀이 물었다. "맞아, 춤 말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토끼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춤이 너무 웃겼기 때문에 암소도 큰 엉덩이를 들썩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닭도 한쪽 다리를 뻣뻣하게 휘저으며 춤을 추었다. 그 장단에 맞춰 농부도 춤을 추고, 뱀도 더 참지 못하고 혀를 날름거리며 춤을 추었다. 뱀이 춤을 추느라 몸이 풀린 사이 농부는 재빨리 목을 빼고 달아났다. 그러면서 옆에서 뛰어오는 토끼에게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삶이 공평하든 공평하지 않든 우린 춤을 출 수 있어!" ~~~~~~ 미립자들은 다 알고 있다 / KIM,H.Y. 인간세상을 포함한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얼까? 두 가지다. 하나는 거시세계를 지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오직 이 두 가지가 전부 다다.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거시세계를 지배하는 것의 정체를 밝혀냈고 막스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닐스보어 등 양자역학자들은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것들의 정체를 밝혀냈다. 거시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상대성법칙이다. 상대성법칙을 동양적 방식으로 표현하면 음양의 법칙이다. 음양(상대성) 변화의 표현 중 하나는 사계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보다 더 절절한 표현은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조화의 원인은 음양의 부조화 즉, 상대성법칙의 교란 때문이다. 무너질 리가 없지만 이것이 무너지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불학실성의 원칙이다. 세포나 분자의 세계까지는 그나마 확실성이 유지된다. 그러나 그보다 작은 미립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계가 펼쳐진다.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세계가 펼쳐진다. 오죽하면 양자역학자들이 도깨비놀음이라 했을까. 오죽하면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 했겠는가. 왜 미립자의 세계는 불학실성의 세계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미립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립자는 작지만, 정말 억수로 작지만 우주만큼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 채워지는 정보는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에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같은 미립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 놀라운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최초는 미립자라는 점이다. 내 곁의 소소한 물건들에서부터 거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그 정체를 파고 들어가면 그 끝은 하나같이 미립자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립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깨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으니 미립자들끼리는 개네들끼리 통하는 소통방법이 있고 그 소통의 속도는 빛보다도 빨라 지구 끝에서 일어난 일이 반대편에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심지어는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도 순식간에 전파가 된다는 점이다. 빛의 속도로 1년 동안 달리는 거리 즉, 광년도 이들 앞에서는 무색해지고 만다. 결국 거시세계든 미시세계든 이들 세계를 지배하는 공통사항은 미립자들이라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미립자들이 저장하고 있는 정보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는 미립자가 이 말들을 다 듣는다. 이를 두고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의 말과 행위 즉, 業을 하늘에 설치되어 있는 아카식 레코드에서 다 녹음을 해둔다고 하는데 세상에 그러한 것은 없다. 미립자가 다 기억하고 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미립자는 이 세상 모든 것을 기억하는 정보의 저장 창고이다. 동시에 여기서 발생된 정보를 저기로 옮기는 정보 전달매체이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불가사의 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많다. 이를테면 BC5세기에 인류 최고의 스승들이 각기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 하나같이 인류에게 올바른 도리를 가르쳤다는 점이 그렇다. 그 가르침은 당시로선 전대미문의 핵폭탄급 내용을 담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가르침을 능가하는 가르침은 없다. 어떻게 비슷한 시기에 약속이나 한 듯이 나타나 비슷한 가르침을 베풀었을까? 일본 원숭이라는 놈이 있다. 일본 최남단 오끼나와 원숭이가 어느날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는 발칙한 일이 일어났는데 최북단 삿포로에 서식하는 놈들도 꼭 같은 행태를 보이더라는 것.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걸까? 이 놈들이 한 짓을 성자의 경우와 비기는 건 불경스러운 일이라 할지 몰라도 그건 인간의 생각일 뿐, 자연은 성자와 원숭이를 차별하지 않는다. 삼성에서 뭔가를 하나 만들어 낼 때쯤이면 어김없이 LG에서도 같은 걸 만들어 낸다. 산업 스파이라도 있어 그러는 걸까? 어림도 없다. 그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미립자라는 존재다. .............................. 인간 세상의 어떠한 비밀도 미립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숨겨도 미립자는 다 알고 다 기억하고 있다. 미립자가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느 한 미립자가 알게 된 정보는 이 세상의 모든 미립자들이 순식간에 공유한다. 그 작은것 속에 어마어마한 정보를 다 담고도 오히려 공간이 남아도는 것이 미립자다. 미립자 앞에서 겸허해져야 한다. 인과응보라는 우주적 법칙도 미립자 때문에 가능하다. 무섭다. 매일 매 시간 스스로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다 까먹어도 내 몸 속 세포 안의 미립자들은 내 평생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물론 전생의 정보도 다 알고 있다. 두렵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 쓸데없는 나라 걱정 / KIM, H.Y 기우杞憂라는 말도 있고 침소봉대針小棒大라는 말도 있다. 쓸데 없는 걱정, 바늘을 전봇대만하다고 과장하는 것을 말한다. 나라 걱정하는 내가 그런 경우였으면 좋겠다 ............................. ● 668년 삼국통일 후 36년 뒤 신라는 유토피아적 극성기를 맞이한다. 성덕대왕과 경덕왕 시대 60년이 그 때다. 이 때 경주는 기와집에 숯(당시는 최고급 연료였다)으로 밥을 지어 먹었고 하루종일 노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하는 바로 그 시대다. 엄정한 자연의 법칙 중 하나는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절정기는 곧 기나긴 하강기를 예비한다. 신라의 극성기도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경덕왕 뒤를 이은 혜공왕, 8살의 어린 나이였다. 4년 뒤 일어난 반란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극성기를 누리던 신라는 졸지에 무너져 내렸다. 그 이후 신라가 나라를 들어 고려에 바칠 때까지 171년 동안 왕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8년, 신라는 그렇게 쓰러져 갔다. 혜공왕이 임금이 되기 바로 직전 해(764년)가 바로 나라 기운이 소진되는 제9운기(離운기)가 시작되는 해였다. ● 고려의 황금기는 1064년부터 60년간 이어졌다. 문·선·숙·예 즉, 문종, 선종, 숙종, 예종이 이 황금기를 이끌었던 임금들이다. 하나같이 도와 덕, 충과 효에 밝았던 임금들이다. 이 중 예종은 윤관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물리치고 6성을 쌓게 한 名君이다. 그러나 예종의 뒤를 이은 인종 때부터 국운이 급전직하 기울기 시작한다. 인종 즉위 후 4년 만에 이자겸의 난이 그 단초다. 그 때부터 고려는 굴러 떨어지기 시작하다가 멸망할 때까지 기한 번 제대로 못 펴고 비실거렸다. 그 시작년도가 인종이 임금이 되기 전전 해인 1124년부터였고 이 때도 제 9운기(離운기)가 시작되는 해였다. 혜공왕 때처럼 역시 특정 임금과 나라 운명이 한 배를 타고 같이 갔다. ● 조선의 전성기는 누가 봐도 세종임금이 한 복판에 있었던 때다. 1424년부터 60년간이다. 세종임금은 1418년 즉위했지만 조선은 7년 가뭄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나라가 허리를 편 것은 1424년, 가뭄이 끝난 후부터다. 60년 전성기는 성종 대까지 계속된다. 성종은 대단히 훌륭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주목하라. 성종의 아들이 연산군이었다는 사실을. 연산군 폭정의 씨앗은 성종 대에 뿌려졌다. 월탄 박종화 소설의 제목대로 “금삼의 피”가 그것이다. 여하튼 조선의 전성기는 연산군의 등장으로 하루 아침에 절딴이 나버렸다. 연산군이 나라를 피로써 물들인 그 때가 바로 제 9운기였다. 그 이후 조선은 史禍정치 100년, (1484년 연산군 대부터~) 당쟁정치 200년, (1584년 선조 대부터~) 세도정치 100년 (1804년 순조 대부터~)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 시작이 연산군 때 제9운기(離운기)부터였다. ................................. 살펴 보았듯이 이 땅의 역사는 60년 전성기 직후 나라는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고 그로부터 다시 전성기가 올 때까지 무려 300년 동안 바닥을 헤매는 패턴을 보여 왔다. 그동안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데 오로지 인간들만 모른다. 전성기가 끝나고 곤두박질 칠 때 바로 그 때는 어김없이 제9운기(離운기)가 시작할 때였다. 공교롭게도 그 때는 꼭 暗君이 나타나 역사를 훼작질하곤 했다. 반대로 전성기 때는 반드시 明君이 나타나 나라를 이끌었다. ................................. 지금 한국은 단군 이래 최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전성기는 1964년에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 전성기도 2023년이면 60년 기한을 다 채우고 끝난다. 공교롭게도 이 해에 임금이 바뀐다. 그 임금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60년 전성기 마지막 해와 2024년 甲辰年부터 시작되는 魔의 제9운기다. 마지막은 늘 그렇듯 어지럽고 해괴한 일로 장식된다. 그런 일은 세월호 참사 때부터 시작되었다. 잘 알다시피 그 후 일어난 일은 모두 정상이 아니다. ............................... 다음 대통령은 2022년에 임기가 시작된다. 그도 혜공왕, 인종, 연산군 같은 운명에 빠지고 마는 걸까? 그렇게 된다면 나라의 앞 일은 보나마나다. 이런 나의 생각이 서두에 말했듯 기우이길 바라는 건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이미 제9운기에 대비라도 하는 양 30년 전부터 찬찬히 준비해온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 늘 경고해 오던 것, 이른바 6대절벽이다. 인구절벽, 성장절벽, 고용절벽, 통일절벽, 리더십(정치)절벽, 대외환경절벽. 게다가 나라 망할 경고성 징조는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2008년 벽두를 장식한 남대문 화재 사건 광우병 파동, 세월호 참사에 이어 작금에 터져 나오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그러하다. .............................. 지금까지 내가 비명을 지르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역사가 이미 경고하고 있고 까막눈이 아닌 다음에야 도처에 깔려 있는 망조를 두고 어찌 杞憂라 하겠는가 그러나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세종임금 같은 대통령이 나오면 최악은 피해갈 수 있다.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는 대통령 말이다. 대통령 직을 오로지 국가와 백성을 위한 자리로 아는 사람 말이다. 세종임금을 성군이라 하는 이유는 그가 그랬던 유일무이한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 두 마리 새 / RYU 두 마리 새가 한 나무에 앉아 있다. 똑같은 깃에 똑같이 생겼지만, 한 마리는 언젠가는 죽을 운명의 새이고 다른 한 마리는 불멸의 새이다. 죽을 운명의 새는 아래쪽 가지에 앉아 있고, 불멸의 새는 맨 위쪽 가지에 앉아 있다. 아래쪽 새는 이 가지 저 가지에 매달린 열매를 쉼없이 따 먹는다. 열매가 쓰면 불행해하고, 달면 행복해한다. 늘 부족함을 느껴 더 많은 열매를 원하며 다른 새들이 먼저 따 먹지 않을까 초조해한다. 하지만 위쪽 가지의 새는 먹지 않고 아래쪽 새를 바라볼 뿐이다. 이 새는 존재 그 자체로 행복할 뿐 열매가 달든 쓰든 관심이 없다. 좋고 나쁨, 행복과 불행에 흔들리지 않으며 완전한 고요 속에 앉아 있다. 쓰디쓴 열매를 맛보고 괴로워하던 어느 날 아래쪽 새는 위쪽 가지에 앉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새를 올려다본다. '저 새는 뭐지? 나는 이렇게 불행한데 왜 저토록 초연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 새를 닮고 싶은 마음에 위쪽 가지를 향해 한 단계 올라간다. 그러나 이내 유혹에 못 이겨 또 다른 열매를 따 먹는다. 열매가 쓰면 몹시 괴로워하며 위쪽의 평온한 새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한 단계 올라간다. 그렇지만 또 금방 잊고 습관처럼 열매에 탐닉한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한 끝에 첫 번째 새는 마침내 두 번째 새가 앉아 있는 맨 위쪽 가지에 이른다. 그 순간 자신이 본래 그 두 번째 새였음을 깨닫는다. 자신들이 서로 다른 두 마리의 새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새였음을. 그리고 아래쪽 가지에서 열매들을 따 먹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던 일들이 다 환영이었음을 자각한다. 고대 철학서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우화이다. 이 가지 저 가지 분주히 움직이는 새는 나의 마음이고, 위쪽 가지에 고요히 앉아 있는 새는 나의 참 자아이다. 열매를 탐닉하는 새는 에고이며, 그것을 초연히 바라보는 새는 참나이다. 그 둘이 함께 앉아 있는 나무는 내 육체이다. 이 두 마리 새처럼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살아간다. 한 나는 상대적인 세계에서 살고, 또 다른 나는 절대적인 세계에서 산다. 세상 차원의 새는 이 가지 저 가지 옮겨다니며 끊임없이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고통의 열매를 맛보는 순간 그 기대가 헛된 것임을 깨닫고 위쪽 가지에 앉은 새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첫 번째 새가 두 번째 새를 알아보는 순간,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가 시작된다. 유한한 자아가 무한한 자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위쪽 가지의 새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앉아 있다. 그 새는 태어날 때부터 그곳에 있어 온 초월적 자아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 자아는 서서히 가까워져 마침내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 무한한 자아가 곧 자신이었음을 깨달아 완전한 평화에 이른다고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단, 그 자아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0년 동안 우울증으로 고통받은 교육 지도자 파커 J. 파머는 두 친구의 비유를 이야기한다. 긴 세월 동안 한 친구가 내 뒤에서 걸어오고 있다. 한 블록쯤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그 친구는 내 관심을 끌기 위해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부른다. 나 자신에 대한 어떤 진실을 말해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듣는 것이 두렵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자만심 때문에 그가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걸어간다. 친구는 더 가까이 와서 더 크게 내 이름을 부르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내 관심을 돌리는 데 실패하자 내 친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밖에 없다. 나한테 심리적 고통이라는 폭탄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나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지막 시도로 나를 자기한테 돌아서게 하기 위해서다. 마침내 나는 친구에게로 돌아서서 묻는다. "왜 나를 부르는 거야? 원하는 게 뭐야?" 그 돌아봄이 자아 탐구의 첫걸음이다. 철학서와 경전들은 뒤에서 부르는 그 친구를 '참 자아'라고 부른다. 이 참 자아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있어 왔다. 이 세상에서의 쓴맛과 불행을 맛보는 순간 우리는 문득 방향을 돌려 참 자아를 찾아나선다. 오래된 습관이 금방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 세계에서 또다시 길을 잃지만, 반복되는 고통과 슬픔은 우리를 내면 세계로 이끌어 마침내 참 자아를 발견하게 한다.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는 내가 있다. 그 나와 가까워져야 한다. ~~~~~~~~
Anna's Theme / Giovanni Marradi

Autumn Rain / Giovanni Marra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