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대통령 /손정모(17002)
꽃 같은 옷을 입기 위해
손가방을 맞추고 놓지 못하고
화려한 목소리로 쏟아 내든 말
시녀의 손으로
옷을 벗었다
손가방도 열었다
그 말들도 가필해 낸 것들
오물을 쏟았든 변기마저 바꾸었다
날마다 새롭다 못해
매일같이 배설되는 거짓 같은 진실
진실이 부끄러워 울었다
날마다 새롭기 위해 산을 오르는
숨 막히는 속살의 단내 맡으며
벌거벗는 대통령의 모습
길라임 주사의 안방마님
꽃은 꽃이 아니다 청춘도 아니다
외골로 박힌 유리조각의 상처였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
온 산야가 벌거벗고 모진 겨울을 난다
겨울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물이 난다
배반의 눈물이다
대한민국의 영광은 배신의 정치에서
꽃이 핀다
부끄러운 웃음 뒤에 핀 영광의 꽃
상처가 너무 깊어
더 화려한 봄날의 꽃에 향기가 난다
2017년1월11일 정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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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상 / 손정모 (17003)
4년을 빌어먹었는데
속이 속이 아니다
맴이 맴도 아니다
노래 한 곡 불렸다고
세상 다 산 것도 아니다
웃고 있다고
말을 다 한 것이 아니다
4년을 빌어먹어도
책을 볼 때가 다 있구나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속이 속이 아닌 것을
맴이 맴이 아닌 것을
노래 한 곡 불렸다면
세상을 다 산 것이지
(살다보면
개밥도 되고
그 밥도 말아 먹을 수가 있다
한참을 그렇게 꼭 4년을
빌어먹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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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닿을 수 없는 그 곳엔 / 김춘경
멀리
창 밖의 긴 산자락 어깨 위로
새벽이 밀려 온다
허공을 돌아 바람을 밀치고 오는
지난 날의 연가를 닮은
아련한 모습이다
"바라보지 마,
눈물이 날 것 같아"
가슴에 저며 드는 혼잣말이
다시 바람을 타고 날아가면
어둠을 삼킨 산봉우리
손 내밀어 닿을 수 없는 그 곳엔
어느 새 그대가 웃고 있다
알싸한 가슴 삼켜 버린
바람이 차다
다시, 새벽이 오면
그 땐 나도
부서지도록 하얗게 웃으리라
산너머 햇살로 오는 그대
눈부시게 빛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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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동 저녁노을 / 류상덕
눈을 감고 귀 열었다. 얘야 문 두드려라.
은행나무 받쳐 든 그 너머에 저녁노을
처마에 걸어 놓았다 자죽자죽 밟고 오렴
저 빛살 지려나보다 어스름이 내리는데
이 산 저 산 실을 걸어 그리운 말 다 풀어도
가슴엔 고운 빛깔이 너를 밝혀 떠 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어느새 속이 삭은
논고동 같은 몸에 여기저기 금이 갈 뿐
채워도 바람만 부는 칠성동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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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한뼘 / 권대웅
멀리서 당신이 보고 있는 달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달이 같으니
우리는 한 동네지요
이곳 속 저 꽃
은하수를 건너가는 달팽이처럼
달을 향해 내가 가고
당신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움은 오래되면 부푸는 것이어서
먼 기억일수록 더 환해지고
바라보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꿈속에서 꿈을 꾸고 또 꿈을 꾸는 것처럼
달 속에 달이 뜨고 또 떠서
우리는 몇생을 돌다가 와
어느 봄밤 다시 만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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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픈 사랑/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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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그려 놓은 사람 / 이해인
내 마음에 그려 놓은
마음이 고운 그 사람이 있어서
세상은 살맛나고
나의 삶은 쓸쓸하지 않습니다.
그리움은 누구나 안고 살지만
이룰 수 있는 그리움이 있다면
삶이 고독하지 않습니다.
하루 해 날마다 뜨고 지고
눈물 날 것 같은 그리움도 있지만
나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 살아 빛나고
날마다 무르익어 가는 사랑이 있어
나의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그려 놓은
마음 착한 그 사람이 있어서
세상이 즐겁고
살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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