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을 기리며 / 손정모(16006)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죽음보다 더한 미명의 세계
황금들판 바람결을 흘려
인고의 계절
그 모든 생 내려놓고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무수히 많은 피난 행렬
하늘행 열차를 기다린다
화려한 부활을 기다리며
승자와 패자 그 중간쯤
보편의 다리를 놓는다
매 시간 열차는 떠나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다
다만 화려한 부활은
활짝 꽃 피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때 마다
봄바람이 불 때 마다 시큰거리는
못 미더움 속 꽃이 피었다
청춘이 꽃피어
다시 사랑할 수 있음
꿈같은 부활이다
생각만 해도 이 봄 황홀하다
그 서러움 버리고 다시 살아나
지난겨울도 잊고
어디서 왔어 어디로 가는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봄꽃같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입에 물고)
정신없이 피고지고 피고 지는데
어리석은 거야 바보같이
기억 저편을 접은 꽃들의 노래
지난 봄 그 화려한 영광의 날들도
이미 부활의 선택에 주어진 조건
오랜 기억을 간직한 당신만이
아직도 순수하지 못한 너울을 쓰고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가고 있다
매 시간 열차는 떠나지만
아무도 모르는 봄 열차는 떠났다
돌아오지 못하는 강 너머로
화려한 꽃들이 웃고 열차는 빠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시간을 안고
기억 저편을 거닐어 보아도
수많은 꽃들은 말해 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 봄 꽃이 떠난 뒤에야
봄 꽃 피는 의미를 알 것 같다
(봄이 하늘로 간 뒤 그 황홀한 미소도
아주 영원히 꿈 꿀 수 없다
때늦은 열차는 그 시간에 오지 않는다)
2016년3월20일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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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 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지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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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 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은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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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유 /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 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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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에게 / 베르톨트 브레히트
참으로 나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 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 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찍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뿐이다.
나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 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저기 한적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은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
(나의 행운이다 하면, 나도 끝장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먹고 마시라고.
네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고!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도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쓰여져 있다.
세상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짧은 한평생
두려움 없이 보내고
또한 폭력 없이 지내고
악을 선으로 갚고
자기의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망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나는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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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갖고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언제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국과 약간의 야채를 먹고
모든 일에
타산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잘 보고 들어 행하고 이해하며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숲 그늘
작은 초가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간호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
부질없는 일이니 그만 두라 하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냉해의 여름에는 벌벌 떨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고
칭찬 받지도 않고
걱정시키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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