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을 일별하고 / 손정모(16003)
언제부턴가 길을 가다가
이 길을 누구누구가 갔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이름을 하나하나 불려보았다
홀로 가는 이 길이
황랑한 머언 길이라도
마음에 꽃이 피니
덩달아 새들도 노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보이고
뒤따라 길을 나서는 그곳에는
앞설 필요도 없이 그냥 가면 된다
여럿이 가는 그 길은 언제나 빛났다
이제 홀로 가는 길을 나설 때마다
등 보이는 사람들도 없이
빛을 찾아 나서는 그곳에는
알 수 없는 미지 미천이다
한 참을 걸어도 이름 하나 없는
고향 어느 길에도 침묵이 흐르고
땅인지 하늘인지 저 홀로 간다
아주 머언 미지의 귀천으로 떠난다
아무 생각도 없이 걷어간다
앞서가는 사람도 데려가고
뒤서는 자도 없는 이름 하나 하나
중얼 중얼거리자 새들이 울었다
2016년3월01일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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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 이 외수
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흐린 세월 속으로 시간이 매몰된다
매몰되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나지막히 울고 있다
잠결에도 들린다
비가 내리면 불면증이 재발한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이름일수록
종국에는 더욱 선명한 상처로 남게 된다
비는 서랍 속의 해묵은 일기장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은
아무리 간절한 그리움으로 되돌아 보아도
소급되지 않는다 시간의 맹점이다
일체의 교신이 두절되고 재회는 무산된다
나는 일기장을 태운다 그러나
일기장을 태워도 그리움까지 소각되지는 않는다
비는 뼈 속을 적신다
뼈저린 그리움 때문에 죽어간 영혼들은 새가 된다
비가 내리는 날은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 새들은 어디에서 날개를 접고
뼈저린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까
비속에서는 시간이 정체된다
나는 도시를 방황한다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범람하는 통곡 속에서 해체된다
폐점시간이 임박한 목로주점
홀로 마시는 술은 독약처럼 내 영혼을 질식시킨다
집으로 돌아와 바하의 우울한 첼로를 듣는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날이 새지 않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목이 메인다
우리가 못다한 말들이 비가 되어 내린다
결별 끝에는 언제나 침묵이 남는다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해도 돌아갈 수 없는 전생
나는 누구를 사랑했던가
유배당한 영혼으로 떠도는 세속의 거리에는
예술이 암장되고 신화가 은폐된다
물안개 자욱한 윤회의 강변 어디쯤에서 아직도
그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쓰라린 기억의 편린들을 간직한 채
그대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야 한다
세속의 시간은 언제나 사랑의
반대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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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 윤수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이토록 가슴 시린 아픔이라는 것을
그대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아픔이 하나의 촛불이 된다는 것을
그대를 알고 나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촛불 하나 켜고 / 최원정
어둠 밝힐
촛불 하나 켜고
욕기慾氣를 눌러 봅니다
내 몸 태우며
주위에 밝음 주는 몸짓에
겸허謙虛를 배워 봅니다
나의
그 무엇으로
당신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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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우면 가리라 / 이정하
그리우면 울었다.
지나는 바람을 잡고 나는 눈물을 쏟았다.
그 흔한 약속 하나 챙기지 못한 나는
날마다 두리번거렸다.
그대와 닮은 뒷모습 하나만 눈에 띄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들개처럼 밤새 헤매어도
그대 주변엔 얼씬도 못했다.
냄새만 킁킁거리다가
우두커니 그림자만 쫒다가
새벽녘 신열로 앓았다.
고맙구나 그리움이여,
너마저 없었다면
그대에게 가는 길은
영영 끊기고 말았겠지.
그리우면 가리라,
그리우면 가리라,
고 내내 되뇌다 마는
이 지긋지긋한 독백,
이 진절머리나는 상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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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삶이 힘겨울 때 / 이채
의미 없이 사는 건 아니지만
살다 보면
살아가는 일이 무의미할 때가 있더라
비우고 또 비우라는 말이
정녕 옳은 줄은 알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러하더냐
잠 없는 밤엔
덮어도 온기 없는 이불이네
어둠이 깊어가듯 고뇌도 깊어갈 때
저 달빛은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드는가
이 세상 모든 돌이
황금으로 변한다 한들
나하고 무슨 상관이랴
저 하늘 모든 별이
우르르 쏟아진다 한들
어느 별이 내 것이더냐
나는 세상을 등진 적 없어도
살다 보면
세상이 나를 등질 때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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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 가는 길 / 이효녕
너무 오래도록
그리움 가슴에 넣어두면
혼자 듣는 고독의 숨소리
쓸쓸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된다
내 안에 오래 그리움 넣어주어
기름 없는 빈 등잔으로
태울 수 없는 이여
꽃이 떨어진 꽃나무처럼
침묵으로 몸을 줄여
혼자 흘러드는 꿈을 꾸는가
잊는 듯 마는 듯 잊고 싶지만
수없이 물결처럼 밀려드는 마음
상처로 돋은 꽃 피우는가
사랑이라는 것은 떠난 뒤에
추억의 꽃은 활짝 피워서
비가 안 내려도 비를 맞고
없는데도 느껴지고
가슴에 작은 길이 생긴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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