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날씨와도 같은 것
흔들리며 피는 꽃처럼.....
하나의 인연이 맑고 화창하다면
다른 인연은 장대비가 내리는 것처럼.....
지나간 날들이 나이를 말함이요
새로이 오는 날이 성숙함이다
떠난 이가 있으면
오는 이도 있는 것처럼.....
비 온 뒤땅은 더 단단해지므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를 되새기며
여러 색깔이 모여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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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처럼 / 황 은 경
회색빛 물감으로
스쳐본다 그 사람
고개 숙인 그 모습
가냘픈 뒷모습이 빗줄기 같아
상처는 가슴에 담고 나를 부른다
비의 무채색이 회색을 만나
어둠을 담고 하얀 노래를 했다
녹아 버릴 기억들을 묻기에 정말 좋았어
그대여
지울 수 없으면 그냥 가져라
그게 너이기에 기억도 다 줄게
미움에 쌓인 자리는 먼지처럼
널 사랑한 마음은 흔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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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가슴 / 성순자
그대 없는 빈 가슴은
어두운 밤인가
한 줌의 고독도
느낄 수 없이 서럽다
시린 혹한에
한 몸 버린다 해도
깨어지는 아픔
이보다 더할까
그대가 떠난
허무의 끝에서 바라본
불 꺼진
수척한 가로등
그림자 없는
가로등 밑 내 모습은
잃을 것도 없는
빈 가슴만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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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을 / 최춘자
어찌하여 이토록 고요한가?
흐르면서 버리고
지나면서 비워
어언 허심(虛心)에 닿았는가.
물빛조차 멈춘
먹먹한 가을 강
쓸쓸하거나 서럽거나
인생의 뒷면은 대개 그렇다
괜찮다 괜찮다
파랑 없이 흘러온 강이 있으랴
잎 져 가벼워진 가을이 아프랴
헐벗은 마음
저 조용한 가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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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오세영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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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랑 /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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