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과 남 사이 / 손정모(16019)
남과 남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가깝고도 먼 거리를
간격이라는
조율 잣대는
늘 심오한 말이 오간다
지구 반대편의 거리도
대화자의 가까움에
현금은 찰라보다 빠르게
간격을 무시한다
현혹의 순간은
정말로 황홀하다
남과 남 사이에는
우리가 있고 친구가 있고
그럼에도 늘
혼자 마침표를
찍었다
나도 찍고 너도 찍었을
사이의 간
붉었다
.
.
.
남과 남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데
너는 알기는 아니
남과 남 사이가
말 못할 사이라는 걸
눈 뜨면 보이는 것
거기 필요한 단어
간격
꽉 찬 숨소리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라봐도 돼
뒤 돌아 보지 않아도 돼
성공하고 잘 살아야 돼
우리가 없어도 돼
친구는 원래 없었든 거야
.
.
.
그래도
아주 먼 날
우리사이 친구였다고
너무 늦게 알아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 안 해도 돼
우린 늘
식어 빠질 때 친구였네
그걸
남과 남사이라고 하는 거야
아니
형제사이라고 해도
믿는 사람 아무도 없네
2016년7월29일ss
------------------------------------
강가에서 / 고정희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둑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쪽 뚝 떼어
가거라,가거라 실어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 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어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
안부 / 정병근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
어디 약속뿐이랴 뱉은 만큼
못다 한 말들 입속에 바글거리고
만나면 만날수록 결별만 수북수북 쌓인다
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나는 제법
늙어서 흰머리를 툭툭 털면서
발톱을 깎으면서 안경알을 닦으면서
생각하건데, 나는 죄의 신봉자였으니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나,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
------------------------------------
나를 지우고 / 오세영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푸른 하늘이 되듯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
'모텔 선인장' 엔 선인장이 없다 / 송유미
'나이아가라 폭포'가 걸린 모텔 선인장엔
언제나 폭포처럼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연인들은 선인장처럼 서로 몸에 가시를
박으며 뒹굴었다.
사막에서 만난 이들은
몸을 주어도 마음은 주지 않았다.
온 몸이 가시였던 이들은
피묻은 새가 되어
걸어나왔다.
네개의 벽이 모두 거울인 모텔 선인장은
언제나 포로노 비디오가 돌고 돌아도
몸이 그리운 연인들은
서로의 벗은 몸만 훔쳐보았다.
벽 속에서
벽을 두고 만나는 이들,
벗은 몸과 벗은 몸 사이...
벽들은
뒹굴어도 깨어지지 않았다.
영혼도 몸도 없는 이들은
몸속 깊이 박힌
가시에 아파하지 않았다.
'두고 가는 것이 없나 살펴봐 '
그들은
두고 가는 것도 없으면서
언제나 두리번 거울 속을 살피면서
그렇게 <모텔 선인장>을 걸어나왔다.
------------------------------------
부고 한 장 / 김숙영
여름이 떠난다고
바람은 호수 위를 물비늘로 걷고 있다.
어쩐 일일까?
물속에 빠져서도
어두움 건저 올리는 교회 붉은 십자가
반기지 않아도 찾아오는
눈가에 잔주름처럼
깨어진 사금파리로 저며 내는
상처마다 핏 자국 흥건히 고이고
아직도 이루지 못한 기도가
거미줄에 걸려 아롱지는데
사물함에 꽂힌 부고 한 장
이름 모르는 묘비 오늘 또 세운다.
------------------------------------
낙서2 / 김숙영
어디에 가 물어보아야 하나
내가 가야할 길
새는 무덤 없어도
숲에다 잠자는 집 짓는다
걸어온 길 보다
걸어갈 길이 더욱 아득한데
밤마다 불면증과 동침하는 여인
불러줄 노래도
들어볼 노래도 없다고 했다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 더 많은 세상인데
그래도 계절은 철따라
옷 갈아입을 줄 안다
멀고도 긴 하늘 길
밤새 걸어와
달이 벗어둔 헐거워진 신발 한 짝
주워들고 따라오는 작은 처녀별
오지도 않을 전화
기다리지 말라며
선잠 깬 바람 일러주고 돌아간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