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습관 / 손정모(14022)
밤9시면 잠드는 여자 자면서도 발소리를 다 듣는 여자
그런 여자 옆에서 잠 못 이루고 문단속을 해야 하는 남자
발정 난 암고양이의 울음소리를 새겨듣는 암전한 남자
문밖의 오고 감이 훤히 들어다 보고 있는 남자
그 밤이 너무 길다
코고는 소리가 잘 익어 갈 쯤 나란히 몸을 뉘이고 체온을 잰다
땀에 절인 숨소리와 뱃속 소화음과 묘한 향기에 마른 진동
날마다 악쓰는 몸부림 한바탕 음탕한 소란이 휩쓸고 나면 쓸쓸하다
오래된 습관도 침묵한다
행동반경도 점점 좁아진다
그러나 생각은 너무 깊고 너무도 넓다
감출 수 없는 담배 내음 돌아눕는다 그 마음 돌아서 간다
매일저녁반주의 취기로 세상모르게 잠들고 싶다
언제부턴가 긴긴밤 잠 못 이루는 무슨 약속이 그리 많은지
밤마다 새끼손가락 여자의 팬티에 걸고 목 놓아 길길이 서성인다
우뚝한 브라 속 늘어진 모성 세우지 못하는 우산 천천히 젖는다
봄비에 젖는 체온의 향기에 꽃잎이 피어 오른다
우리도 남들처럼 각방에서 편안히 잠들고 싶다
암고양이가 창문을 넘고 담을 넘어 길거리에 쏘다닌다
다 지나 가리라 그런 밤도 또 오지 않으리라 청춘이여
악을 쓰듯 부드러워질듯 오래된 습관도 봄눈처럼 사라져 가리다
2014년3월18일ss
퀵서비스 / 장경린 봄이 오면 제비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씀바귀가 자라면 입맛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비 내리는 밤이면 발정 난 고양이를 담장 위에 덤으로 얹어드리겠습니다 아기들은 산모 자궁까지 직접 배달해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상품권으로 교환해드리겠습니다 꽁치를 구우면 꽁치 타는 냄새를 노을이 물들면 망둥이가 뛰노는 안면도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혼백은 가나다순으로 잘 정돈해두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제비들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쌀쌀해지면 코감기를 빌려드리겠습니다 -시집『토종닭 연구소』(문학과지성사,2005) ---해--설----권-순-진-시-인--------- 퀵서비스는 말 그대로 빠른 배달 서비스다. 수수료만 지불하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보낼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제 시간에 받을 수 있다. 요즘엔 임신한 아내가 갑자기 먹고 싶은 별별 희한한 것들도 전화 한 통화면 바로 해결해주는 곳이 퀵서비스다. 처음엔 고작해야 서류나 작은 물품을 주고받는데서 출발했겠으나 지금은 뭐든 편하게 빨리 주고받기를 바라는 현대인의 심리에 시장의 과다경쟁이 부채질하여 서비스 품목이 많이도 늘었다. 사실상 택배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퀵서비스의 형태일 것이다. 실로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란 욥기의 말씀처럼 창궐해있고 취급품목도 버라이어티 하다. 봄이 오면 제비들을’ ‘씀바귀가 자라면 입맛을 돌려 드리는’ 얌전한 서비스로부터 시작해 ‘발정 난 고양이 울음소리’와 ‘꽁치 타는 냄새’같은 아직은 서정적인 것들을 거쳐 ‘아기들을 산모의 자궁까지 직접 배달’하는가 하면 자신이 남처럼 느껴질 때 ‘언제든지 상품권으로 교환’까지 해준다니 서비스의 다변화가 참으로 놀랍다. 낡고 헛김 빠지는 정경유착 이야기는 건너뛰기로 하고 혼백을 정리해 주고 코감기까지 빌려주겠다니 가히 우리네 삶 전반이 퀵 서비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 속도의 경쟁에 휘말려들어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일을 급하게 서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급증이 생기고 성질도 더러워진다. 속도가 마음을 옥죄어 너그러움을 빼앗고 심성을 거칠게 만든다. 또한 추가비용이 발생하여 그걸 벌충하자니 마음은 더 불안해지고 붐빈다. 자신을 일찍 배달시켜봐야 별 볼일이 없음에도 꼭 KTX에 몸을 실어야 하고, 우체국에서도 비싼 등기 속달이라야 마음이 놓인다. 요즘 우체국에서는 아예 보통우편은 찬밥 신세라 창구직원은 미리 이렇게 말한다. "언제 배달될지 우리도 모르고 배달 확인은 물론 안 됩니다" 얼마 전 멀쩡하던 핸드폰을 버렸다. 앞으로 또 어떤 속도의 마법이 등장하여 구식을 내동댕이칠지 모를 일이다. 몸과 머리와 마음을 덜 쓰게 하는 기술은 혁신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제는 손발뿐 아니라 머리와 가슴마저 고생시키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편리와 효율과 안락에는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퀵서비스로 배달 받고 싶은 품목이 있긴 있다. 주말에 함께 여행갈 종아리 싱싱한 '프리티 우먼' 그딴 것 말고, 이를테면 계절을 갈아타는 이무렵 개화의 속도도 따라잡지 못하는 칙칙한 마음에 재미없는 이야기도 수시로 까르르 웃어주고 웃을 때 목젖이 보이는 뭐 그런 여자. 그대들은 연분홍치마 바람에 휘날릴 이 봄날 저 만능의 도우미에게 무엇을 주문하고 싶으신지... 아내의 정부/ 문동만 다시 저 사내 아내는 아파 드러누웠고 잠시 아내의 동태를 살피러 집에 들른 것 어떤 남자가 양푼에 식은밥을 비벼 먹다가 그 터지는 볼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 그렇지 오랜 세월 아내의 정부였다는 저 남자 늘 비닐봉다리를 가방처럼 들고 다니며 옛 여자의 냉장고를 채워주는 게 업이라는 사람 평생 조적공으로 밥을 벌어먹었고 시멘트가루 탓인지 담배 탓인지 목구멍에 암덩어리를 달고서야 일도 담배도 놓았다는 저 사내다 늘 성실했으나 사기꾼들에게 거덜 났던 사내다 아픈 옛 여자를 위해 공양인 양 쌀죽을 쑤어 바치고 잔반을 털어 비벼 늦은 점심을 때우고 간다 온다 말없이 문을 잠그고 돌아가는 이 오래보는 삽화의 주인공 나도 이 한낮 그처럼 쓸쓸하여 그가 앉았던 식탁을 서성거린다 개수대는 밥풀 하나 없이 말끔하고 아내는 잠 깊고 그러니 나는 사랑의 무위도식자로 그 행적에 질투하며 순종하고 마는데 그가 되돌아가는 긴 내리막길에 삐걱거리는 뼈마디에 가벼운 보자기에 순종하고 마는데 내 원하는대로 해주지 아내의 정부! 이 딴 순애일랑 내 못 본 체 할 것이니 오래오래 두고두고 즐기시지 - 시집『그네』(창비, 2009) 무슨 추리소설의 앞부분처럼 시가 전개되는데 등장인물간의 모호한 충돌이 일어난다. 아내는 누구의 아내이며 옛 여자와 정부는 누구고 또 나는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그냥 편하게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로 요약하자. 시 속의 '나'는 그저 곁다리며 그들의 습관적 사랑을 훔쳐보는 정도로 간추려 생각해두자. 어쩌면 ‘인간 극장’같은 텔레비전의 한 장면일지도 모르겠고, 시인이 노동하며 알게 된 주변의 한 사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시는 나를 가련히 여긴 어떤 이가 기별도 없이 보내준 소포 같은 것이다’라는 시인 자신의 진술처럼 '아내의 정부'란 바로 남편인 자신을 객관화한 시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시는 얼핏 지순하면서도 소박한 사랑시로 읽히는데 같은 암페어의 긴장된 전류가 흐르고 있다. 어설픈 비유와 언어를 버리고 자연스럽고 평범한 진술을 통해 주제를 적절히 녹여 독자를 감전시킨다. ‘아픈 옛 여자를 위해 공양인 양 쌀죽을 쑤어 바치고’ ‘ 개수대는 밥풀 하나 없이 말끔하게’ 치워놓고 다시 가벼운 보자기를 들고 나서는 그에게서 비록 그 자신 식도암에 걸린 처지이긴 하지만 그녀의 굳건하고 눈물겨운 정부(情夫) 아닌 정부(政府)를 본다. 시집 '그네' 전편에서 감지되는 문동만 시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자 주제는 생계와 노동이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삶 그 자체인데 시인 스스로도 그것과의 끈질긴 싸움을 벌이는 터다. 그의 둘레에 놓인 삶의 뒷모습엔 늘 가난과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흐물흐물 순응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저항의 나이'라며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의 목청을 돋우며 분투하고 있다. 시인은 이 봄에도 '봄노래'만을 낭창하게 부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저 봄에게 미안해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더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과 시의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며 작품으로 문제의식을 내밀화한다. - 권-순-진-시-인- |
'신작(Newly)'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4024) 어차피 살아 갈 일이라면 / 손정모 (0) | 2014.03.28 |
|---|---|
| (14023) 조용한 눈물 / 손정모 (0) | 2014.03.25 |
| (14021) 봄의 속삭임 / 손정모 (0) | 2014.03.12 |
| (14020) 모르는 것에 대히여 / 손정모 (0) | 2014.03.06 |
| (14019) 샌텀 스파이더 / 손정모 (0) | 2014.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