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굼뱅이 재주 / 손정모(15002)
굼뱅이가 굴을 파고 꿈틀거리 때
하늘 색깔을 물어보지 않는다
토끼가 산야를 휘젖고 뛰어 볼 때
땅은 향기로 가득찬 숲풀속에 있다
세상은 그대로 흐리고 개이고 맑다
무얼 노래하거나 등이 가려워도
멀거머니 보고있는 것이 하늘이다
굼뱅이 걸음으로 십리를 가면
산 것이 아니라 죽어서 간 것이다
토끼가 뛰지 않고 굼뱅이 걸음할 때
그는 토끼가 아니라 굼뱅이 재주다
하늘이 몇 번 바뀌고
땅이 몇 번 용트림할 때
어느날 굼뱅이 입에는 욕설이 나오고
토끼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굼뱅이는 눈이 있을까
굼뱅이도 재주를 부리면 눈물이 난다
토끼가 그렇게 하고 싶은 욕설
끝내 하지 못하고 참는 것도
굼뱅이 재주가 무서운 것이다
굼뱅이 재주는 정말 무섭다
욕이 나오고 눈물이 나오고
하늘도 땅도 없다
그렇게 천리를 간다는 굼뱅이
(봄은 하늘 보기 위한 길을 가지
얼굴을 쏘옥 내밀고 가는거야)
2015년1월12일ss
====================================
마음의 地圖속 별자리 / 황지우
새벽은 밤을 꼬박 지낸자 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地平線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 날이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 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있다
단 한걸음도 생략할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있다
나는 너니까
우리는 自己야
우리 마음의 지도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거야
====================================
호라지좆 / 김중식
난 원래 그런 놈이다
저 날뛰는 세월에
대책 없이 꽃피우다
들켜버린 놈이고
대놓고 물건 흔드는
정신의 나체주의자이다
오오 좆같은 새끼들 앞에서
이 좆새끼는 얼마나 당당하냐
한 시대가 무너져도
끝끝내 살아남는 놈들 앞에서
내 가시로 내 대가리 찍어서
반쯤 죽을 만큼만
얼굴 붉히는 이 짓은
또한 얼마나 당당하며
변절의 첩첩 山城 속에서
나의 노출증은 얼마나
순결한 할례냐 정당방위냐
우우 좆같은 새끼들아
면죄를 구걸하는
告白도 못 하는 씨발놈들아
시집『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1993)
.............................................................................
시가 언제 쓰진 것인지 반드시 알 필요는 없지만,
시작 배경의 이해를 위해서는
발표 시점에 관한 정보가 도움이 될 경우가 있다.
이 시는 90년대 초
노태우가 전두환에 이어 집권했을 당시,
‘한 시대가 무너져도 끝끝내 살아남는 놈들’이
여전히 판을 치는 꼬락서니에 분개하며
조롱을 퍼붓는 해학의 입담이다.
차가운 소주잔에 울분을 섞어 마셨던
술집들의 골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다.
3당 합당이니 구국이니 둘러대며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고
‘변절의 첩첩 산성 속에서’ 참을 수 없어
기어이 대놓고 내갈기는 오줌줄기이며 ‘정당방위’다.
사실 ‘호라지좆’은 욕이 아니라 식물의 이름이다.
그 뿌리는 ‘천문동(天門冬)’이라는
귀한 이름의 약재이고
호라지좆죽을 쒀먹으면
피부미용에도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들었다.
부지깽이 나물이라 하여 반찬으로 무쳐먹기도 한다.
하지만 ‘우우 좆같은 새끼들아’ ‘씨발놈들아’는
분명히 욕설이다.
욕은 욕이되 ‘면죄를 구걸하는 고백도 못하는’
얍삽한 자들에게 퍼붓는 욕이다.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추락하면서
그 정도 욕이야 까짓 거 못하겠는가.
돌이켜보면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고,
아팠었고 격렬했었다.
1990년 서울대 국문과 출신의 67년생 시인은
시집의 자서에서
‘그래도 한때는 최선을 다해 방황했다’고 밝혔듯이
다 지난 일이고 세월이다.
그때 목울대를 떨면서
울분의 술을 들이켰던 자들도,
스스로의 삶을 방목했던 이들도
세월과 함께 무뎌진 용기에 타협을
적당히 희석한 부드러운 소주를 마실 뿐이다.
대책 없는 젊음의 고단한 삶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한때 젊음을 뜨겁게 불살랐던 가치들이 뒤집어지고,
물신주의와 개인주의 시대로
급속히 변화하는 물결 가운데
자아니 정체성이니 하는 것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이론적 방편으로만 무장되어갔다.
많은 386이 그랬고, 486이 그러고 있고,
586 또한 그럴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김중식 시 ‘이탈한 자가 문득’중에서)
‘그렇게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라고
항변만 할 것인가.
‘단 한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
불안에 떨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이야말로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아닌가.
어제 청와대 문건유출사건 규명을 위해
열린 국회운영위원회에서
청와대 비서실 사람들이 보여준
어이없는 작태들은 그야말로
갈수록 태산이고 가관이었다.
청와대의 조직과 인사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져 있음을 방증한다.
부러 이러기도 쉽지 않다.
얼마나 국민을 ‘홍어좆’으로 보았으면
그토록 뻔뻔하고 막무가내일까.
‘오오 좆같은 새끼들 앞에서
이 좆새끼는 얼마나 당당하냐’
‘호라지좆’의 위용으로 다시 욕 나온다.
‘면죄를 구걸하는 告白도 못 하는 씨발놈들아’
대통령은 이 난세에 대한
최종책임을 져야할 사람이다.
모조리 해임하고 쇄신하지 않으면
국민들은 ‘정당방위’를 위해서라도
당신을 향해 거취를 물을 것이다. 권순진
=====================================
나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 / 박이도
실수처럼 내 손에서 떨어진
꽃 한 송이
강물에 떠내려간다
낮달처럼 내 품속에서 떠나간
사랑의 체온,
흐르는 강물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숨을 죽인다
이제 내 마음 속에서
아프게 아프게 되살아나는
지난날의 그림
모든 이웃을 등지고
마을을 떠나는 이 죄인의 그림자를
지신밟듯 짓밟고 가는
소 한 마리
성황당 비탈의 상수리나무에서
일제히 뜨는 새들이 부럽다
젖무덤 같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너머
불타는 노을이 그립다
이 적막함이 두렵다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창비, 1991)
====================================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
너무 재미만 찾으면 안 되리.
인생의 어느 시기는
낙타 같은 고행의 길도 있어야 하리.
지금이 그때인지도 모르는 것이니,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는지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으리.
그런 저승길은
얼마나 홀가분하고 편안할까,
지상에 미련 남기지 않고 떠나는 그 길은....
====================================
두 번 다시 지나갈 수 없는 세상
삶이 나에게 주는 선물 중에서
때론 내 삶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어떤 일에 '참 잘했구나'하고 미소를 짓고
어떤 일에 그때 그렇게 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후회를 하게 될까 하는 상상을 해 보곤 합니다.
어찌 되었건, 세상과 작별을 고할 때
후회와 미련이 남기보다는 그래도 내 인생은
좋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겠지요
삶에는 정답이 없다지만
그래도 누군가 한 이야기가
가슴에 꼭 와 닿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니겠지요
만일 내가 베풀어야할 친절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지극히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주어야할 좋은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렇게 하리라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을 두번 다시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