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

쉬지말고 가라 고이는 순간 썩어리(5편)

intervia 2014. 1. 17. 17:50



기억의 체증 - 이은규



몸이라는 집에 잠시 머물다 떠날 것들

저마다 자리를 움트는 족족

체증을 일으키고 있다

요사이 당신이라는 집에 세들고 싶다는 나의 목소리가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서성이고

자주 식욕이라는 덜 빈 잣죽 그릇과 마주했다



난감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피가 그런걸 어떡해 라고 대답했다



사혈(瀉血), 피를 흐르게 하다

기억처럼 긴 실로 엄지 손가락을 묶는다

손톱 끝의 검게 갇힌 시간들을 찌르는 바늘

맺힌 시간의 피돌기가 풀리며 건네는

피의 말이 멀리서 들릴까

귀에 머물지 않고 사라지는 그 말들의 뜻

동그랗게 말려 올라오는 검붉은 시간들

언젠가는 열망으로 맺히던 기억의 끝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들의 전언

내 몸에 잠겨 있던 전언들이 피가 되고

그 피가 살이 되어 생의 피돌기로 살아 있다



검은 시간은 흘러 없어질 거라는 환한, 착각

울지 않기 위해 시간의 잇몸을 앙다물다

시시로 미치던 피의 순간이 있었다

기억의 체증에 오래 시달려야 할 것 같은 예감

바람을 숨으로 빚어내는 것도 일인 것처럼

시간이 흐른다

십년 묵은 체증이 풀린다는 말이

꿈인 것만 같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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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 이병률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보면 걸다보면



시월과 십이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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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 송찬호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있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기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지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

그 완성을 위하여

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



폐허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속에서 우리가 살인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풍성한 과일을 볼 때마다

그의 썩은 얼굴을 기억하듯



여기 그가 잠들다

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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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군요 - 김충규



나비가 날아간 길이 허공의 확장된 혈관이다

햇빛의 찌꺼기들이 혈관 속을 내달린다



공허는 나의 등 뒤에서 시든 풀처럼 서걱거리고

바람 냄새에 얼룩진 벌레가 발아래 기어가고



중얼거림으로 시작된 내 노래가 사방에 울창한 숲을 이룰 때



모든 숲엔 새들이 흥건하나 이 숲엔 새 하나 들지 않는군요



내가 태어나던 순간의 첫 울음을 기억해보려고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을 때 나비가 다가와 귀에 앉는다

첫 울음의 파장으로 나비는 날개를 얻었을까요?

내 혈관에 내 첫 울음이 매장돼 있다면

나비를 가루로 만들어 주입하여 그 울음 캐낼 수 있다면



노래는 울음이 되지만

울음은 노래가 되지 못하고



내 정수리에 태양이 친필로 서명하는 오후 2시



어제 익사한 구름이 축 늘어져 있고

고양이 한 마리가 제 발등에 반복하여 침을 묻히고



나는 구름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고양이와 나는 서로 눈을 맞추지 않죠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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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누에 - 이일림



누에가 온몸을 기어 다닌다. 뽕잎처럼 나는 작아진다.



푸른 뽕밭 위로 달이 뜨던 날,

밤새 빗소리가 들리고 뽕잎엔 수많은 구멍이 생겼다.

보름달을 갉아먹던 누에가 꿈틀거리자, 점점 달이 사라진다.

달의 변장술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달을 깨문다.

스웁, 바라보는 내 입안에서 달이 터진다.

삼삼한 바람이 구름의 실꾸리를 풀어 박음질 몇 땀을 뜬다.

나는 달의 그림자 뒤편에 놓인 서랍 속 일기장을 꺼내 읽는다.



실처럼 너를 토해놓고 고개를 가누지 못했다.

한잠 자고 난 사이, 너는 사라졌다.

나를 벗어 너를 짓고 싶었다.

다섯 번의 잠을 자고 나면 내 집이 될 줄 알았다.

네 번째 잠을 잘 때 누에의 꿈속으로 너는 찾아왔다.

얼레를 가면처럼 쓴 누군가 문밖에서 소곤거렸다.



바람이 허물 벗는 소리로 울었다.

허공 속의 울음이 사방을 둘러보는데,

뽕밭에 빈 몸으로 서 있는 너.

너는 바로 나로구나!

놀라 고함을 지르자, 내 입속에서 하얀 실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구름이 온몸에 침묵을 친친 감았다.

비가 멎고, 섶은 하얗게 익어갔다.



똑, 똑 누군가 보름달을 노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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