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

위대한 약속

intervia 2014. 8. 9. 15:26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조지프 에디슨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내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아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 있는 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이 묻힌 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 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이윤학 점심 무렵, 쇠줄을 끌고나온 개가 곁눈질로 걸어간다. 얼마나 단내 나게 뛰어왔는지 힘이 빠지고 풀이 죽은 개 더러운 꼬랑지로 똥짜바리를 가린 개 벌건 눈으로 도로 쪽을 곁눈질로 걸어간다. 도로 쪽에는 골목길이 나오지 않는다. 쇠줄은 사려지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치는 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밀려가듯 개가 걸어간다. 늘어진 젖무덤 불어터진 젖꼭지 쇠줄을 끌고 걸어가는 어미 개 도로 쪽에 붙어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곁눈질을 멈추지 않는다. 하염없이 꽃가루가 날린다. 시집『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8) ------------------------------------ 저, 저, 하는 사이에/ 이규리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시집『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2014) ----------------------------------- 비둘기에게 버스운전을 맡기지 마세요/ 이은림 올해는 봄도 길고 겨울은 더 길었군 흘러가는 강물도 한없이 길지 내 귓속에서 포클레인들이 떠들어대는 것 같아 세면대를 채우는 것이 흙탕물은 분명 아닌데 아침마다 한참동안 수돗물을 흘러 보내며 조간신문을 읽네 투표소의 줄도 길더군, 처음이야 선거일이면 티격태격 통화하는 아빠와 나 강물은 강물이고, 투표는 투표고 어디에 달렸든 바퀴는 둥글지 그저 굴러갈 수밖에 없긴 한데…… 포클레인은 너무 시끄러워서 말이야 빨간 버스, 초록 버스 번갈아 지나다니지만 타야할 버스는 지독히도 오지 않네 긴 봄부터 기다리던 버스가 갑자기 당도한 여름에 우리 앞에 멈추고 그저 묵묵히 바퀴를 굴려댄다 앞바퀴 뒷바퀴 천천히, 혹은 빨리 굴러가는 바퀴는 굴러가는 게 전부인 것처럼 한없이 구르다가는 멈추고, 뙤약볕 아래서도 무조건 다시 굴러가고 한 번의 신호 정도는 무시하고 달려간다 엄마, 버스운전은 비둘기에게 맡기는 거 아니지?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교각 아래 줄지어 앉아있는 한 떼의 비둘기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아이는 무럭무럭 잘도 자란다 시집『그림자 보관함』 (문학의전당,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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