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조지프 에디슨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내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아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 있는 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이 묻힌 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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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이윤학
점심 무렵,
쇠줄을 끌고나온 개가 곁눈질로 걸어간다.
얼마나 단내 나게 뛰어왔는지
힘이 빠지고 풀이 죽은 개
더러운 꼬랑지로 똥짜바리를 가린 개
벌건 눈으로 도로 쪽을 곁눈질로 걸어간다.
도로 쪽에는 골목길이 나오지 않는다.
쇠줄은 사려지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치는 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밀려가듯 개가 걸어간다.
늘어진 젖무덤 불어터진 젖꼭지
쇠줄을 끌고 걸어가는 어미 개
도로 쪽에 붙어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곁눈질을 멈추지 않는다.
하염없이 꽃가루가 날린다.
시집『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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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 하는 사이에/ 이규리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시집『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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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에게
버스운전을 맡기지 마세요/ 이은림
올해는 봄도 길고 겨울은 더 길었군
흘러가는 강물도 한없이 길지
내 귓속에서 포클레인들이 떠들어대는 것 같아
세면대를 채우는 것이 흙탕물은 분명 아닌데
아침마다 한참동안 수돗물을 흘러 보내며
조간신문을 읽네
투표소의 줄도 길더군, 처음이야
선거일이면 티격태격 통화하는 아빠와 나
강물은 강물이고, 투표는 투표고
어디에 달렸든 바퀴는 둥글지
그저 굴러갈 수밖에 없긴 한데……
포클레인은 너무 시끄러워서 말이야
빨간 버스, 초록 버스
번갈아 지나다니지만
타야할 버스는 지독히도 오지 않네
긴 봄부터 기다리던 버스가
갑자기 당도한 여름에 우리 앞에 멈추고
그저 묵묵히 바퀴를 굴려댄다
앞바퀴 뒷바퀴 천천히, 혹은 빨리
굴러가는 바퀴는 굴러가는 게 전부인 것처럼
한없이 구르다가는 멈추고,
뙤약볕 아래서도 무조건 다시 굴러가고
한 번의 신호 정도는 무시하고 달려간다
엄마, 버스운전은 비둘기에게 맡기는 거 아니지?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교각 아래 줄지어 앉아있는 한 떼의 비둘기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아이는 무럭무럭 잘도 자란다
시집『그림자 보관함』
(문학의전당,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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